잘못된 국가시스템에 의해 짓밟힌 인권들, 결국 상하는 건 사람이다


2014년 6월 어느 날, 죽는 이유도 모른 채 동료 병사에게 죽어간 이름 없는 대한민국 병사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즐거움을 위해 삶의 터전을 뺏겨 변두리로 쫒겨나고, 살 수 있게 해달라며 발버둥치다 허망하게 스러져가는 도시 빈민들의 아픔을 기억해야 합니다. 치열하게 상식적으로 살려고 발버둥치다 불의의 살인을 저지른 한 젊은이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사건A-강원도 GOP총기난사 사건]


지난 2014년 6월21일 8시 15분경, 강원도 동부전선 GOP에서 제대를 3개월 남긴 병장의 총기난사로 같은 부대원 5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 임모 병장은 도주 이틀 후인 23일 오후까지 3500여명의 병력이 동원된 수색작업 끝에 자살을 기도했으나 생포되었다. 임병장에 의해 죽임을 당한 피해 병사의 아버님이 하신 말이 있다. "임병장도 피해자일지 모른다"


주목할 만한 점은, 현재 경위에 대해 수사가 진행중이지만 사건 발생 직후 총에 맞은 3명이 적절한 지혈이 되지 못해서 결국 출혈과다로 사망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공' 자가 들어간 직업군들에게 위기대처능력과 창의성 같은 기대를 하지 못하는 서글픈 현실이다. 세월호 사건의 관/군의 미흡한 초동 대처능력이 선량한 시민을 죽음으로 몰고간 것과 흡사하지 않은가?


사건 발생의 원인은? 잘못된 '똥군기문화' 와 사람을 보호하고 생각하지 않는 몰인권적 실적위주의 군대 시스템과 잘못된 국가의 정책 기조이다. 단적인 예로 '관심병사' 제도는 글자 그대로 "이 사람은 요주의 인물" 이라는 공개된 낙인으로 작용하게 되며, 결국 주변인과 당사자에게도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연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아닌 것이다.



[사건B-월드컵 난민과 민간인들의 죽음, 그리고 올림픽 난민]


2014년 브라질월드컵. 경기장 건설공사 무리한 일정 맞추느라 몇 달 걸러 인부 9명 사망한 나라 브라질 이야기다. 전 세계인들의 즐거움을 위해 20만의 집 잃은 '월드컵 난민' 이 거리로 나 앉게 되는 월드컵.


월드컵은 엄청난 경제효과에도 불구하고 FIFA와 다국적 대기업들만 배불리는 돈잔치 중 하나일 뿐이다. 올림픽과 월드컵이 열리던 바르셀로나(1992년, 스페인), 애틀랜타(1996년, 미국), 아테네(2004년, 그리스), 베이징(2008년, 중국) 때도 그랬다. 물론 2014년 현재, 인권이 없는 나라 브라질과 1988년 한국 서울의 72만명의 '올림픽 난민' 상황은 그대로 연결된다.


2014년 브라질, 빈민을 위한 정치/경제는 없다


피파월드컵을 풍자하는 거리의 그림, 그 앞을 지나가는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함이 대비된다


군인들에 의해 밀려 쫒겨가는 빈민 천막촌의 아낙네. 이것이 비단 지구촌 멀리 남의 나라 일이기만 할까?



<참고>브라질월드컵의 빈민가 학살 사진이라고 잘못 알려진 사진1(시리아 내전 자료 사진이라고 알려짐)



<참고>브라질월드컵의 빈민가 학살 사진이라고 잘못 알려진 사진2(시리아 내전 자료 사진이라고 알려짐)



동영상은 브라질 정부가 용인한 사설 경비업체(과거 한국의 백골단 같은 공인된 깡패용역집단)의 잔인한 인권탄압과 민간인, 기자들 대상으로 하는 공격 상황을 그대로 보여 준다.



월드컵에 대비한 도시정비를 명목으로 민간 경비업체(미국 용병업체 '아카데미', 이라크 민간인 학살로 유명한 블랙워터의 후신)와 군경을 동원하여 탄압을 일삼아온 브라질 정부. 노동자 출신 룰라도 결국 신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하며 경제발전에만 몰입하여 망국의 시대로 이끌고 있다.


지난 6월 월드컵이 본격 개막되는 시기에는 군 병력 20만이 브라질 전역에 배치되고 27만개의 충격탄과 주요 거점에는 장갑차가 배치됐었다. 작년 6월의 버스비 인상을 계기로 터져나온 대중시위 이후로 심각한 국가 폭력이 자행되어 왔으며 월드컵을 계기로 절정에 이르렀다 한다(☞  뉴스참 기사 참조).


<뉴스참 기사 일부 발췌>

...


이러한 대테러법으로 정부는 무엇보다 ‘마피파(마피아와 피파의 합성어)’의 월드컵에 맞선 집회와 시위를 단속하고 있다. 


그 동안 수많은 활동가와 시위 참여자들이 연행됐으며 일부는 강력 범죄로 기소되고 있다.일례로 노숙인인 라파엘 프라가는 시위 중 살균제 1병과 표백제 1병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을 받았다. 지난 2월 시위 중 사고로 인해 사망한 카메라맨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시위에 참여한 한 사람은 30년형을 언도받을 예정이다. 테러 혐의를 이유로 수감된 활동가는 20일 동안 잦은 구타와 햇빛을 볼 수 없는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상파울루, 리우데자네이루 등 각 주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 월드컵 시작 전 ‘범행 모의’를 이유로 활동가들을 사전 검거하고 있다. 11일에도 리우데자네이루 당국은 활동가 4명을 사전 구속했다.


[출처: http://revolution-news.com/]


‘마약과의 전쟁’ 구호 아래 빈민가 진압...2년 간 약 2천명 사망


뿐만 아니라 브라질 군경은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구호 아래 전국 10여 개의 빈민지역에 대한 ‘점령 작전’을 벌이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리우데자네이루 빈민가 ‘마레’의 15개 지역에 사는 13만명은 군사점령 아래 생활한다. 지난 3월 21개 장갑차로 무장한 해군이 첫 번째로 진압에 나섰으며 이후 대테러부대(BOPE) 1,200명의 특공대가 합류했다. 15개 지역 중 뉴홀란드와 유니온팍 2개 지역에서 경찰은 ‘집단체포영장’을 허가받아 어떤 가택이든 진입할 수 있으며 누구라도 체포할 수 있다.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구호 아래 모든 주민을 '범죄자'로 간주하고 있다. 군은 다른 도시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상시적인 초소를 배치했다. 


그러나 브라질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의 대부분은 마약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미 브라질 마약왕 마르셀로 산토스는 검거됐고 주요 마약 조직을 소탕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은 군대가 빈민지역을 진압하고 점령한 이유는 빈익빈 부익부를 초래하는 도시 개발에 맞선 빈민지역의 자기 조직적인 투쟁을 사전 제압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그 동안 빈민지역에 대한 정부의 진압은 큰 희생자를 낳아 큰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 주간지 <더 위크>는 7일 브라질 정부의 공식기록을 인용, 2012년부터 ‘마약과의 전쟁’으로 1,890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러한 브라질 정부의 빈민지역과 시위 진압은 이라크 민간인 학살로 악명 높은 ‘블랙워터’의 후신 ‘아카데미’가 깊숙이 개입돼 있다. 

...


또한, 스포츠의 상업화 붐을 탄 경제적 효과와 함께 국민의 눈과 귀를 막으려는 독재자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다. 이것도 결국 사람이 먼저가 아닌, 신자유주의 기조에 편승하여 오직 경제발전 만을 추구한 잘못된 국가 시스템과 정책 기조 때문이다.



[사건C-1977년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


대한민국의 1970년대는 정부의 시책으로 인한 철거민 사건이 즐비하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의 새마을운동, 왜곡된 지역주의와 근대화를 위한 무리한 경제 정책들 때문이다. 실제로 70년대에 발생한 일부의 철거민 관련 사건들이 아래에 나열된다.


1970.3. 성산동 철거민 100여명 서울 시청 농성(철거 대책 요구)

1970.4. 와우아파트 거주민 40명 옥상 농성(철거 보상 요구)

1970.9. 동대문구 창신동 무허가 판잣집 철거민 400여명 철야 농성

1970.11. 영등포구 사당동 판자촌 거주민 1000여명 철거반원/기동경찰과 투석전

1971.8. 8.10 광주대단지 사건

1971. 8. 인천 부평 공설시장 노점상 500여명 격렬한 시위

1971. 연희동 아파트 주민 청계천변 농성, 실로암 교회와 송정동 주민 시위(전투경찰 1천여명 출동)

1971.10. 천안 완촌동 빈민, 무허가 건물 강제철거 사후대책 요구 농성

1974. 실로암 교회, 활빈 교회와 송정동 주민 시위

1975.5. 동대문구 답십리동 무허가 판자촌 주민 철거 시위(52명 연행)

1976.5. 면목5동 철거민 시위

1977. 영동 철거민 사건.

...


<출처: 1970년대 도시하층민의 범죄와 정치,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이제 '무등산타잔 박흥숙 사건'에 대해 사실관계의 요점만 짚어 보도록 하자. 블로그의 성격상 긴 글 전체를 게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인데, 사건 전말의 출처에 해당하는 두 건의 조사 논문의 원문을 아래에 따로 링크를 걸어둘 예정이다(원저작자의 의도에 의해 본 글에서 다운로드 링크는 걸지 않음. 구글링 등으로 검색하시거나 댓글로 별도 요청 주세요).


박흥숙은 누구인가?


1954년생인 무등산타잔 박흥숙은 1980년, 27세의 짧은 생을 사형으로 마감당한다. 일명 박정렬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평범한 도시 빈민이었다. 사건이 일어나던 해 1977년의 상황을 보기 전에, 우선 그가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는 전남 영광군의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 났으며 당시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고 어머니는 구멍가게를 하며 살림을 어렵게 이어 나갔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아버지는 돌아가셨으며 이듬해에 형도 세상을 떠났다. 남은 식구는 그와 어머니,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 둘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항상 1,2 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했으며,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자립심이 강한 아이로 기록되어 있다. 부친의 사망 뒤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가족은 무등산으로 옮겨 무허가 움막 생활을 하고, 박흥숙은 군서 지역에 남아서 학업을 이어가기로 했고, 원불교 재단의 도움으로 영광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한 때 육사지망생이었던 그는 가난을 견디다 못해 학교를 그만두고 점원이나 열쇠수리공으로, 여동생은 시내 가정부로, 모친은 절간의 식모살이를 하며 연명하다 무등산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살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손으로 무허가 움막을 짓고 어머니에게 바친다. 그는 이 움막에서 공부하여 중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1977년 당시에는 고등학교 검정고시와 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박흥숙이 무등산에서 지내면서 찍은 사진. 이런 사진 몇 장으로 언론은 그를 '무등산타잔', '무등산수호신', '18기 창시자' 라며 폭력을 즐기는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이 글을 보는 남자분들, 생각해 보시라. 10-20대 팔팔한 나이에 사진 찍으며, 또는 거울 앞에서 이 정도 폼 한 번씩 안 잡아본 본 분 있습니까?



무등산 국립공원 지정과 정부 철거 정책


사건 당일인 1977년 4월 20일, 박흥숙이 거주하던 광주시 동구 운림동 산 145번지 중심사 계곡, 덕산골(정식 명칭은 운림부락, 속칭 무당골 또는 무당촌)에 광주시 동구청 소속 철거반원 7명이 당도한다. 무등산 국립공원 지정과 함께, 정부의 도시계획이 박차를 가하고 있던 시점이라, 이 전에 수차례 계고장이 발부되었고, 이제 덕산골의 모든 무허가 건물을 실제로 철거하기 위해 온 것이다. 결정적으로, 철거민들을 위한 제대로 된 이주 대책도 없이, 전국체전이 열리는 시점에, 단지 박정희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에 올지도 모른다는 예상 하나로 말이다.


당시 철거반원들은 타 지역에서의 무허가 주택 철거나 노점상 철거 작업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시는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무허가주택들을 "쓸어버리도록" 지시 받았던 것이다(당시 이 철거반원들을 세인들은 '망치부대'라고 불렀다). 하지만 박흥숙은,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치자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이, 흥분한 어머니를 다독이는 등 차분하게 대응했고 집 안의 세간을 꺼내는데도 협조했다고 한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흐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철거반원이 집에 불을 지르려고 하자, 천정에 돈 30만원을 숨겨 둔 어머니가 뛰어들려다가 철거반원이 이를 제지하기 위해 밀쳐내자 실신하는 장면에서인 듯 하다. 철거작업에 계속 순응하였던 박흥숙은 이 때부터 철거반원들을 위협하고 노끈으로 묶어, 집 근처 산등성이 쪽에 공부방을 짓기 위해 파 놓은 구덩이에 몰아 넣는다.


이 때까지도 그는 철거반원들을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철거반원들은, 장정 여러명이 키 작은 젊은이에게 포박당한 상황을 우습게 봤는지도 모른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어느 순간엔가 살기를 품기 시작한 박흥숙은, 철거용 망치로 4명을 죽이고 1명은 중상을 입히게 된다. 사건의 실제 내용은 여기서 끝나지만, 이후에 이 나라의 조잡한 언론과 권력이 어떻게 이 사건을 호도해 나갔는지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진실을 외면하고 발행부수에만 몰두하는 가짜 언론은 그 자체가 폭력이다 


찢어지는 가난을 딛고 열심히 공부해서 뭔가를 이루어 보리라던, 효성이 지극하고 온순하며 성실하지만 혈기 넘치는 젊은이를, 이 나라의 언론들은 '무등산타잔 박흥숙' 이라는 괴물로 포장한다. 또 사건이 일어났던 덕산골은, 사이비 종교가 횡행하는 '무당촌' 이라는 이름으로 부각되고 사건은 호도되기 시작한다.


즉, 무등산을 타잔처럼 날아 다니는 무술 유단자, 폭력을 즐기는 깡패 같은 박흥숙이 되어 버렸고, 덕산골은 이 세상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는, 없어져야 할 사이비 종교활동과 범죄의 온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예로부터 덕산골은, 근처의 무당들이 굿 하는 장소로 계곡을 자주 이용해 왔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 호도 과정의 시초는 당시의 '전남매일신문'의 1977년 4월 21의 기사이다. 지방의 이름 없는 일간지에서 해당 지역의 엽기적 사건으로 대서특필하며 짭짤한 재미를 보게 되는 것이다. '전남매일신문'은 사실 관계 확인도 없는 소문과 심지어 소설로 날조까지 서슴치 않았다. 예를 들어 "박흥숙의 어머니는 반 무당"이며 "박흥숙은 무당촌의 실력자, 광주 시내에 집이 3채" 라는 등. 중앙의 유력지들과 잡지들도 이에 질세라 호도된 사실을 퍼다 나르고 세인의 주목을 받기위해 혈안이 된다.  대다수의 유력 일간지들(경향신문, 한국일보, 중앙일보 등)과 '아리랑' 같은 잡지가 그들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박흥숙은 자수를 하게 되지만(사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의심스러운 간첩 혐의자를 신고하기 위해 안기부에 연락을 했고, 이 과정에서 자수를 하게 된다), 당시에는 검거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건이 있은 후, 3년간의 시간 동안 그를 구하기 위한 구명위원회가 백방으로 활동하였지만 결국 사형이 확정되고, 1980년 12월 24일에 박흥숙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자, 이 사건에 숨은 진정한 문제는 무엇일까? 그 원인의 가장 깊숙한 바닥에는 박정희의 경제개발정책이 깔려 있다. 경제개발이 잘못된 것을 말함은 물론 아니다. 브라질이나 대한민국의 신자유주의에 내재된 공통점은 '인간중심' 이 아니라 경제 지표 중심, 외형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이고, 그 당연한 결과로 거대기업에게 혜택이 크게 돌아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그에 따라 국가의 외형적 성장은 돋보이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시민이나 하층민들은 상위 기득권들, 수구 정치권 또는 거대기업의 착취와 탄압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외면하거나 잊으면 안된다.


[참고] 2014년 12월 업데이트(관련 기사)

한겨레신문: ‘무등산 타잔 박흥숙’ 34년만에 진혼제 연다

한국일보: [지평선] ‘무등산 타잔’ 박흥숙

광주드림: 내가 기억하는 ‘무등산 타잔, 박흥숙’


[참고] 2015년 10월 업데이트(팟캐스트 링크)

이작가, 이박사, 세작의 이이제이: 박흥숙 특집


사건 A, B와 C 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하는가? 국가와 기업의 동반 성장, 참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 국가나 기업의 구성원은 결국 대다수의 사람이고, 국민이다. 결국 사람이 없는, 인권을 중요시 하지 않는 정책과 경제개발은 극히 일부의 상위권들만 배부르게 만들고, 또 다시 그들을 특권 계층으로 치켜세워주고 상위와 하위의 격차만 커지게 되는 악순환만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 이지 않은 나라, 경제와 상명하복만 중요시 하는 잘못된 국가시스템과 인재상, 돈만 중요한 신자유주의, 독재자의 딸이 아버지의 DNA를 이어 받아 3년 째 독재자 흉내를 내고 있는 2014년 대한민국의 민낯을 보며 ...




- Barracuda -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Barracuda

Bryan의 MemoLog. 쉽게 익혀 보는 IT 실습과 개념원리, 코딩 세계의 얕은 맛보기들, 평범한 삶 주변의 현상 그리고 進上, 眞想, 진상들